
하이큐!! - 오이카와 토오루x츠키오카 세츠에
*해오라비난초 :: 꿈 속에서도 당신을 생각합니다 ___written by. Yudit
오이카와 토오루는 제가 생각하고 있는 인물에 대한 평가를 내렸다.
정체가 뭔지 알 수 없는 인간.
수석이니, 천재니 하며 온갖 수식어에 예쁘장한 얼굴까지 합쳐져 스포트라이트를 잔뜩 받고 있는 주제에, 본인의 존재감은 지극히 옅다. 정확하게는, 시선을 잡아끌지만 결국 그 자리에는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나 환상 같은 느낌이었다.
인형 아가씨. 동급생들 사이에서 유명한 그녀의 별명을 입으로 발음해 보며 들고 있던 펜을 까닥였다. 그러고 보니 유리 인형과도 닮았을 지도 모르겠네. 여차 하면 깨질 것 같은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외모과도 닮았으니.
수많은 여자친구들이 있었음에도 배구 이외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던 오이카와가 이토록 한 여자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 이유는 하나 뿐이었다.
최근 돌연히 꿈에 나타난 소녀가 최근 자신의 주위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바로 그 츠키오카 세츠에였기 때문이다.
생기를 찾기 힘든 거의 죽은 눈으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자신을 응시하고 있을 뿐인 소녀. 그 것이 하루 이틀 정도가 아니라 일주일 가량이 반복되자 결국 오이카와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문제의 인물에 대한 조사를 시작한 것이다.
이름, 츠키오카 세츠에.
소속은 저와 같은 아오바죠사이 고교 1학년 6반. 배구부 후배인 쿠니미와 같은 반이었다.
그 외에도 쉽게 얻을 수 있었던 정보는 꽤 어렵기로 유명한 학교 입학 시험을 만점이라는 사상 초유의 점수로 통과했다던가, 이번 시험도 만점이었다던가와 같은 성적에 관한 이야기들 뿐이었다.
‘아, 츠키오카 그 애... 아마 저랑 같은 반일걸요. 중학교도 같은 키타이치 나왔을 텐데.’
‘더 아는 건 없는 거야, 쿠니미쨩?’
‘글쎄요... 반에서는 워낙 말이 없어서. 무뚝뚝하다기 보다는 그냥 말 그대로 잘 만들어진 움직이는 인형 같아요. 분위기랑 소문 때문에 말 거는 애들도 없고, 자기도 별로 말 하고 싶어하진 않는 것 같던데요. 그나저나 이런 건 갑자기 왜 물어보시는 겁니까?’
‘글쎄, 필요한 일이 있어서?’
그런 유명인이 키타가와 제일 중학교 출신이라니, 그렇다면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을 터인데. 정보는 모일수록 더더욱 꼬여만 갔다.
역시 모르겠다, 일단 내일 생각하자.
오이카와는 툴툴거리며 펜을 내려놓고 의자에서 일어나 꾸물꾸물 이불 속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 * *
온통 새까만 공간에 두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하나는 푸른 잎이 가득한 나무였고, 하나는 언뜻 보면 잡초로 오인할 만큼이나 특색 없는 풀이었다. 하지만 하얀 학이 내려앉은 듯 한 꽃이 피어나고 있어 한참이나 오이카와는 작은 풀을 바라보고 있었다.
닮았네.
누구를?
* * *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꿈에 그 아이가 아니라 나무와 풀꽃이 나온 것을 빼면. 얻은 정보는 없었고, 장본인을 만날 기회도 없었다. 역시 답답하네.
라인 바깥에서 공을 던져 올리며 빠르게 도약했다. 크게 휘두르는 손끝에 걸리는 공의 감각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계속해서 공을 잡아 허공으로 띄우고, 도약하고, 내리꽂고. 몇 번이고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사이에 문득 든 생각은 그를 멈칫하게 하기 충분했다.
꿈은 무의식의 반증이라 했다. 아무리 기괴한 악몽이나 초현실적인 풍경이라 한들 자신이 한 번 이상 접했던 것들의 요소들이 뭉쳐 만들어 내는 것들인 것이다.
그런데 제가 그 꽃을 본 적이 있었나?
처음 보는 꽃이었기에 더욱 신기하게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뒤늦게 생각하니 밀려오는 위화감. 배구 말고는 크게 주위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그가 꿈에 상세하게 나올 만큼 꽃을 자세하게 볼 일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거기에 자신이 한참이나 들여다 보고 있었을 만큼 특이한 꽃이라면 분명 희미하게나마 기억에 남았을 터인데, 자신의 기억 속에는 아무리 찾아도 존재하지 않는 꽃이었으니.
그래, 그는 방금 가장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게, 꿈에 나왔어.’
다시 한 번 신경질적으로 공을 아슬아슬한 라인 안 쪽으로 때려 박아 넣으며 숨을 몰아 쉬었다. 방금의 한 번으로 이미 모든 공은 체육관의 바닥을 어지러이 구르고 있었기에, 오이카와는 걸음을 옮겨 하나씩 공을 다시 주워 담기 시작했다.
어떤 이유에 있는 것이든, 절대 정상적이지 않은 현상이었다. 모든 열쇠는, 그래.
꿈속의 그 소녀가 쥐고 있겠지.
* * *
“뭘 하고 있는 거야? 늘 미동도 없어서 뭘 물어 보려고 해도 그동안 말도 못 걸었다구.”
오이카와가 눈을 접어 환하게 웃었다. 여자아이들에게 꽤나 잘 먹히는 미형의 얼굴, 거기에 특유의 상큼하다고 표현되어지는 미소까지 추가되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순식간에 꺅꺅거리며 좋아하곤 했다.
그럼에도 소녀는 목소리에 반응해 소리가 들려 온 자신의 쪽을 힐끗, 바라보기만 했을 뿐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제가 바라보고 있던 꽃의 긴 잎사귀를 손끝으로 천천히 쓸기 시작했다.
“...이 꽃, 뭔지 알아요?”
소리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뚜렷하게 들려오는 담담하고 맑은 목소리. 그래, 이런 소리를 청아하다고 하던가. 뭘 하고 있냐는 물음에 돌아온 대답은 전혀 질문과 맞지 않았음에도, 오이카와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소녀의 바로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소녀가 계속해 응시하고 있는 것은 분명 어제 제가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던 꽃이었다. 긴 잎 위에, 꽃이 피었다기보다는 마치 새하얀 학이 내려앉은 듯 한 모습을 하고 있는.
“글쎄, 꽃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어서. 아가씨는 뭔지 알아?”
아가씨라는 호칭이 거슬렸던 건지, 아니면 제 말에 무언가 문제라도 있었던 건지. 옅게 미간을 구겼다 다시 편 소녀가 입을 열었다.
“해오라비 난초에요. 그렇게 흔한 꽃은 아니니 모르셨다고 해도 별로 이상한 건 아니지만.”
소녀가 고개를 돌렸다. 전에는 그리 탁한 색으로 죽어 있던 회색 눈이, 이제는 스포트라이트 같은 하얀 빛을 받아 완연한 은빛으로 반짝였다.
시선이 허공에서 뒤엉키고, 알 수 없는 감정이 번진다. 순식간에 시야가 흐릿해졌다.
* * *
꿈과 현실 사이 어딘가에서 붕 떠버린 존재. 그것이 나였다. 현실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꿈. 어디에선가 봤구나, 싶은 장면이 반복된다면 그 것이 현실. 어쩌면 다시 반복되는 꿈일지도.
꿈이든 현실이든 간에, 언제나 그는 그 자리에 있었다. 언제나 환한 빛을 내며 그 코트 위에 강한 존재감으로 뿌리 내리고 있었다.
내게 보이는 그는 모순덩어리였다. 누구보다 화려해 보이지만 그 속은 철저히 썩어 들어가고 있는 것이 저와 닮았기에 나는 그를 연민했고, 혐오했고, 애증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 것은 내가 그와 동일시하는 과거의 나 자신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이었으니.
내가 재학중인, 그리고 그의 학교명인 아오바죠사이 (靑葉城西) 처럼 대지에 굳게 뿌리박힌 나무인 그는 그 아름다운 잎새와 거대한 위용을 자랑할 수는 있을지언정 제 후배인 까마귀나 라이벌인 독수리처럼 자유롭게 상공을 활보할 수는 없다. 하늘에 닿을 수 없다.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한계였고, 열등감이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발전의 계기가 되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래. 그것이 오이카와 토오루가 현실에서조차 발 붙이지 못하고 어딘가에서 홀로 도태되어 버린 나와는 다른 이유였다.
앞 날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고 하지만, 결국은 누군가의 장난감일 뿐. 운명의 억지라는 것 앞에는 그 어떤 발버둥조차 소용 없다. 따라가지 않는다면 끌려갈 뿐인 것을. 나는 그것에 굴복하고 순응했다. 무기력한 쳇바퀴 속 회전의 연속이었다. 그런 나의 모습과는 다르게 그는 끊임없이 저항했다. 발버둥쳤다. 그리고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을지언정 천천히 어느 정도의 성과를 이루어 가고 있었다.
자신은 고고한 학을 가장했지만 이리저리 흔들리며 겨우 살아남고 있을 뿐인 난초. 그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무. 똑같이 하늘에 닿을 수 없는 식물이건만 왜 이리도 다른지.
지독한 동족혐오. 그리고 동경. 부러움. 복합적인 감정들이 뒤섞인 그 끝은 짙은 검보랏빛 애증.
천천히 짙어져 가는 감정들을 검푸른 심연 아래로 가라앉혀 숨긴 나는 그와 단 둘이서 마주보고 서 있었다.
무의식인가, 미래인가, 현실인가. 구분은 포기한 지 오래지만 이런 비현실적인 어둠에 스포트라이트라니. 무의식인 것은 확실했다.
나는 자신의 앞에 왜 그가 서 있는 것인지 고민을 거듭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내가 꿈에 나올 정도로 오이카와 토오루를 의식하고 있었던가. 물론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람들 중에서 내가 그 정도로 복합적인 감정을 가진 사람은 거의 그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한참을 아무런 움직임 없이 서 있었다. 오이카와 토오루 역시 내 쪽을 바라본 채로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제 무의식이 만들어낸 환상이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 일을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 * *
하루, 이틀, 사흘. 계속해서 같은 꿈이 반복되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제 꿈이 변덕스러운 것은 늘 있는 일이었으니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어느 날은 오이카와 토오루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대신하듯 자라난 것은 푸른 잎이 울창한 나무. 그 곁에 자리 잡은 언뜻 보면 잡초로 보일 만큼이나 자그마한 난초가 위태로워 보였다. 제 무의식이라고 제가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재현한 것인가.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닌데도 제법 현실감이 넘쳤다. 아니, 현실감이라고 하는 건 애초에 꿈과 현실의 구분이 모호하니 좀 어울리지 않는 말인가?
허탈한 웃음을 내뱉고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작은 풀을 하염없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고고한 취급을 받는 주제에 그 자체는 연약하기 그지없다. 학을 닮은 하얀 꽃이 아슬아슬하게 잎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뭘 하고 있는 거야? 늘 미동도 없어서 뭘 물어 보려고 해도 그동안 말도 못 걸었다구.”
어느새 다가온 꿈속의 오이카와 토오루가 말을 걸어왔다. 아무리 제 믿지 못할 뇌의 성능이라지만 인간 하나를 이렇게 정교하게 구현해 낼 만큼이라니, 대단하기 그지 없었다.
조금 생각해 보니 대답해 줄 말도, 이유도 없는데. 손을 뻗어 길게 뻗은 잎사귀를 손끝으로 훑으며 생각했다. 그리고 순간 든 충동.
어차피 허상이니, 털어 놓아도 상관없지 않을까.
“...이 꽃, 뭔지 알아요?”
“글쎄, 꽃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어서. 아가씨는 뭔지 알아?”
그가 내 옆의 아무 것도 없는 바닥에 주저앉으며 답했다. 내가 알고 있는 그가 나를 아가씨라는 낯간지러운 호칭으로 불렀던가. 오히려 나는 그와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한 적 없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조금, 뭔가 어긋난 듯 한 느낌이 들었지만 애써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해오라비 난초에요. 그렇게 흔한 꽃은 아니니 모르셨다고 해도 별로 이상한 건 아니지만.”
내 안에서의 그라면 알고 있는 편이 더 이상할 것이다. 그는 늘 배구 이외의 것에는 그렇게 관심을 두지 않는 이였으니까. 그 편이 나에게는 훨씬 나은 일이었다. 그는 내게 관심을 가질 일이 없었고, 그가 나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뭐라 정확히 정의내릴 수조차 없는 추잡한 감정들을 들킬 확률이 낮아진다는 것이었으니.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아니면 내가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니 만큼 아무 표정도 보이지 않을까.
생글생글 웃고 있던 표정이, 내가 고개를 움직여 두 눈을 마주치는 순간 멍하니 풀렸다. 그 갈색 눈동자 안에 담긴 감정은, 그건 뭐야?
현실과는 다르겠지만, 여기 있는 당신은 나에 대해서 뭘 생각하고 있어?
아아, 역시나.
닿을 리 없는 사람을 증오하고, 애정하고, 사랑을 갈구하는 가치조차 없는 쓰레기 같은 제 감정은 어디에, 어떻게 버려내야 할까.
* * *
오이카와는 수업 시간에도 도저히 집중하지 못했다. 제 앞에 놓인 영어 지문을 읽고 있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귓속을 통과해 반대쪽 귀로 흘러 나가는데도, 머릿속은 그저 멍하니 같은 장면을 반복해 재생하고 있을 뿐이었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회색, 아니 은빛의 눈동자. 금속질의 은이라기보다는 투명한 보석에 가까운 느낌. 그러나 그 속에 내비친 감정은 저를 순식간에 뒤흔들고 가기에 충분했다. 순식간에 스쳐지나간, 여러 가지 복합적인 덩어리였지만 오이카와의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 단 하나였다.
나를 사랑해 주세요.
어딘가 결핍되어 있는 듯 한 분위기와 성격 - 그렇기에 인형 아가씨라는 오글거리는 별명이 붙은 것이겠지만 - 에, 제 기억 속에서 보인 눈빛까지. 다시 한 번 만난다면,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대화하고 싶었다.
오이카와는 결국 제대로 수업을 듣는 것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창문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슬슬 여름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는 푸른 잎들이 물결처럼 넘실대고 있었다.
* * *
“저는 나무가 부러워요.”
여느 때와 같은 의미 없는 말의 연속이었다. 대화라기보다는 의식의 흐름을 전달하는 것에 가까운 언어의 교환. 하지만 그렇기에 거짓으로 쌓은 탑 위에 올라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 츠키오카 세츠에가 가장 솔직해질 수 있는 시간.
“나무는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고, 한 번 정착하면 쉽게 무너지지 않으니까요. 약한 풀처럼 그리 쉽게 바람에 흔들리거나 꺾여 죽어버리지 않아요. 그게 부러운 거예요.”
오늘은 난초 앞이 아니라 거대한 나무의 줄기 밑 그늘에 자리를 잡고 앉은 소녀가 말했다. 오이카와는 이제는 익숙하게 소녀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가씨는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거야?”
한참의 정적 끝에 튀어나온 말은 소녀의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글쎄, 두려운 것이라. 수도 없이 많죠. 내일이라던가,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본능적 공포라던가. 그 수많은 것들 중에 단 한 가지를 꼽자면,
“어딘가에 고정되지 못하고 계속해서 어중간한 위치에 떠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이요?”
오이카와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세츠에는 그런 반응이 당연하다는 듯 천천히 눈을 감으며 나무 둥치에 완전히 몸을 기댔다.
“나무는 아무리 키를 늘려도 까마귀나 독수리처럼 하늘에는 닿을 수 없을지 몰라도, 먹이를 찾아 헤매고 때로는 사냥당하거나 굶어 죽기도 하는 그들과는 다르게 비교적 안정된 기반이 있어요.”
재능이라 함은 꼭 한 가지 분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컨트롤로써의 재능. 우시지마 와카토시의 파워로써의 재능. 각자의 장단점이 분명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굳이 하늘이라는 것에 얽매이지 말라는 거예요. 방향은 다를지 몰라도 당신은 충분히 그들만큼이나 멀리 닿을 수 있을 테니까.”
꿈이기에 할 수 있었던 말이겠지. 분명 현실에는 닿지 못할 말이겠지만. 그냥, 늘 그런 말을 해 주고 싶었다. 츠키오카 세츠에는 흐릿하게 웃었다. 뭉쳐 덩어리진 감정들이 천천히, 조금씩 물에 녹아 풀려가고 있었다.
그 순간, 오이카와 토오루는 자신의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 * *
여전히 제 일상은 변하지 않았다.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지, 꿈을 꾸고 있는지. 아니면 미래를 보고 있는지. 그 세 세계 사이의 애매모호한 경계선 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것은 언제나 익숙한 일이었으니까.
변한 점이라면 딱 하나, 이제는 현실보다 꿈이라는 장소가 더 편안해지고 존재가 확실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츠키오카 세츠에가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인형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공간. 제 무의식 속의 오이카와 토오루가 매일같이 찾아오는 공간. 처음과는 다르게 조금이지만 대화라고 할 수 있을 법 한 이야기를 나누고, 조금씩 편하게 웃고. 현실에서 보이는 모습은 변하지 않았지만 제 정신 상태가 평온해지고 있다는 것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이제는 익숙하게 침대에 누워 잠에 들고, 다시 눈을 뜨자 익숙한 검은 풍경이 보였다. 아름드리나무가 자라고, 그 옆에 여린 난초 꽃송이가 자라나는.
바스락.
절대 들릴 리 없는 소리에 급히 뒤를 돌아 소리가 난 곳을 살펴보았다. 암흑 속이지만 확실히 균열이 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내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내 무의식은, 내 무너지기 직전의 정신을 붙잡기 위해 이 공간을 만들고,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인물의 허상을 만들어 낸 것일 테다. 이제는 내 정신 상태가 많이 안정됐으니 더 이상 이 공간이 있을 필요도 없겠지.
쓴 웃음을 지으며 균열을 관찰하기 위해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허상임을 알면서도 너무 많은 정을 줘 버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전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고민을 하는 자신이 스스로도 웃겼다.
“오이카와 선배님.”
어느 순간 나타나 조금씩 무너져 가는 풍경과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그가 보였다.
* * *
그것은 낯선 감각이었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희미하게나마 웃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얼굴에 열이 몰린다는 것을. 이와쨩은 왜 그렇게 기분 나쁘게 실실 쪼개냐며 나를 한심한 눈길로 보고 갔고, 나머지 배구부원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미 깨달은 사실은 그런 눈길 따위 아랑곳하지 않을 만큼의 효과를 자랑했다.
아, 나는 그 아이를 좋아하는구나.
잠자리에 드는 것이 기다려지고, 한 마디라도 더 이야기 하고 싶은 사소한 욕구들이 모여 낸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결과는 배구 바보 오이카와 토오루에게는 일생일대의 변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제 감정을 깨달은 오이카와가 즐겁게 잠자리에 들었던 것과는 다르게, 꿈 속의 풍경은 제가 그토록 기다리던 익숙한 풍경이 아니었다.
“오이카와 선배님.”
끄트머리에서부터 산산조각나 천천히 부서져 가는 공간을 배경으로, 너는 처음과 같이 슬픈 눈동자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동안 감사했어요.”
왜, 왜 그러는 거야. 나는 여기 있는데, 뒤늦게야 알아챈 감정인데. 어째서 잡을 기회조차 주지 않는 거야?
“제가 처음 선배님하고 한 마디라도 했던 날 보고 있었던 해오라비 난초. 그 꽃의 꽃말이 뭔 줄 아세요?”
꿈 속에서도 당신을 생각합니다.
“현실에서 만날 용기는 없어서, 제가 선배님에게 잘못을 저지른 걸지도 몰라요. 현실에서는 저를 모르신다고 하더라도, 그 동안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좋아했어요.
누구보다 환하게 웃음 짓는 그 얼굴이 마치 우는 것처럼 보였다.
그 마지막 생각과 함께, 검은 세계는 완전히 산산조각나며 가루로 흩어져 사라졌다.
* * *
변하지 않은 하루, 무미건조한 삶. 정신 상태가 조금 나아졌다고 해도 절대 평범한 사람처럼 살아갈 수는 없었다. 몇 번이고 어느 쪽인지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일상이었다.
문득 교정의 이제는 녹음이 울창한 큰 나무가 생각나 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지난번의 꿈에 나왔던 나무와 꽤 닮은 것이라 더 시선이 끌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슬슬 따갑게 내리쬐기 시작한 햇볕을 피하기 위해 그늘 안쪽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나무 반대편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꽤나 큰 키를 보아하니 남학생인 듯 했다.
남이 있든 말든 공간은 꽤 넓어 자신이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였기에 신경쓰지 않고 조금 더 나무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이제 나뭇잎도 파릇파릇한 게, 우리 학교 이름이랑 어울리는 진짜 여름이지?”
익숙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그가 빠져나간 빈자리에 허전해했던 것이 바로 엊그제였는데, 잊을 리가.
하지만 현실에서의 오이카와 토오루는 저를 모르는 것이 맞을 테니, 쓸데없는 미련은 남기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그리 생각하며 오이카와 토오루에게서 시선을 돌려 넓은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섭섭하네, 나무는 있는데 난초는 없으니까 말이야.”
...난초?
아니, 기억할 리가, 아니, 알고 있을 리가 없는데.
“이 오이카와 씨가 난초는 구하기도 기르기도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말이야, 이번만 아가씨가 난초 대신 꽃 해 주면 안 될까?”
아가씨라 부르는 장난기 넘치는 목소리도. 너무나도 익숙하고도 그리운 것이라 오히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분명 기뻐야 할 텐데도 기분이 복잡한 상황이었다.
“꽃말은... 그래.”
현실에서도 그대를 사랑합니다.
“어때?”
그 마지막 한 마디에, 그토록 혼란스럽던 머릿속이 깨끗이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것은 내가 만든 환영이 아니라, 진짜 오이카와 토오루. 그리고 꿈은 현실이 되어, 내가 단단히 고정되어 있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든다.
“...좋아요.”
나는 그 순간, 몇 년 만에 진심으로 활짝 웃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