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이큐!! - 쿠로오 테츠로x칸나
*붉은 장미 :: 열렬한 사랑 ___written by. KANA
식물은 보기 좋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어린 날, 학교에서 과제로 페트병에 허브계열의 식물을 키웠었다. 누군가는 보람찬 일이라 하지만 손수 키우는 일은 번거로웠다. 고작 꼬박꼬박 물을 챙겨주는 것조차도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는 식물에 대해 깊이 생각할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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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는 결코 작다고는 할 수 없다. 구태여 표현하자면 컸다. 크고 복잡하다. 길을 잃어버릴 정도로 복잡했다. 그런데 어째서.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칸나는 눈을 감았다.
“그 선배, 여자친구는 있을까?”
있습니다. 놀랍게도. 내뱉지 못하는 말에 입안이 썼다. 남의 대화를 엿들으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네코마 고교 근처의 카페였다. 네코마에 다니는 학생들이 많이 오는 것은 당연했다. 그럼에도 혼자서 상대를 기다리고 있자니 지나치는 붉은색의 넥타이와 담색 치마에 눈길이 갔다. 거기까지는 별 의미 없었다. 푹신한 카페 소파에 앉아 등받이 너머로 익숙한 이름이 들려오기까지는. 칸나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그러니까, 왜 하필이면 오늘 이 시간에 이 카페에서 그 화제가 꽃 피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괜한 생각을 곱씹는다고 없는 일이 되진 않았다. 까르르, 등 뒤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에 어째 속이 쓰려 오는 것 같았다. 엿들을 생각이 없었다지만 들은 것을 못 들은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 할까. 눈을 굴리다가 칸나는 전화를 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테츠로군. 그, 카페에 사람 많으니까 다른데서 봐요. 으음, 이 근처에 새로 생긴 화원이라던가? 응. 그래요.”
등 뒤로 유리문이 닫히며 통화를 끊었다. 다행스럽게도 날씨가 좋았다. 실내가 아니어도 기다리는데 문제가 되지 않겠지. 바뀐 약속 장소는 며칠 전에 새로 들어선 화원이었다. 아까 그 카페와 역의 중간 즈음에 있으니 왔던 길을 되돌아간 셈이었다. 어차피 집에 가려면 역까지 가야 할 테니 크게 상관은 없었고 인적이 드물어 약속을 잡기에 적당한 위치였다.
화원은 벽에 난 창문까지 담쟁이 넝쿨이 뻗어 있어 눈에 띄었다. 전체적으로 녹색 물결의 정원이 있었다. 식물은 좋아하지도 그렇다고 싫어하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보고 있자니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다. 칸나는 활짝 핀 꽃들을 내려다봤다. 보기 좋았다. 도망친 걸까. 한 소녀의 기대를 깨부수고 싶지 않다는 안일한 친절은 아니었다. 자신은 그런 선심을 쓸 정도로 여유로운 사람이 아니므로. 그저 거기 그대로 앉아 있었으면 벌어질 일들이 뻔히 보였다. 그래서 피하고 싶었고, 도망쳤다. 단지 말뿐이었다. 이름을 말하며 들떠 하는 목소리, 수줍게 관심을 표하는 말, 피어오르는 거북함. 자신이 그곳에 계속 있었다면, 그대로 테츠로군이 날 보기 위해 그 카페에 왔더라면, 이라는 상상이 가리키는 가능성이 뻔했다. 그 아이는 그를 놓치지 않고 발견했을 것이고 그 시선은 곧 내게로 향했을 터였다. 호기심과 적의가 뒤섞인 눈으로 바라봤겠지. 그건, 불편했다. 이런 점까지 신경 쓰는 건 역시.
“싫다....”
“뭐가?”
미간을 누르며 고개를 젖혔다. 바로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칸나가 눈을 달리 떴다.
“테츠로군.”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쿠로오는 흘러내린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가 뗐다.
“이거 이거, 부르는 목소리도 못 듣고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던거야, 누님?”
“불렀다고요?”
칸나는 눈을 굴렸다.
“그냥, 좀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거, 테츠로군보다 중요한 겁니까? 섭섭하네-.”
치켜 올라간 눈썹과 달리 목소리가 장난스러웠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아침드라마에서 남편의 직장 부하가 남편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알아차린 부인의 마음과도 같은 거죠?”
“에.”
나름 장난스레 웃으며 내뱉은 말이었지만 다갈색 눈동자가 내려다보며 안색을 살폈다.
“무슨 일 있었어?”
이런, 웃어넘기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는 눈치가 빠르고 돌보는 데 익숙했다. 알고 있었다. 작은 투정도 입 밖으로 낸다면 그는 신경 써 줄거다. 결코 허투로 넘기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말하고 싶지 않다. 칸나는 몸을 기울였다. 쿠로오의 가슴팍에 뒤통수가 닿았다. 의지가 되는 모습은 못 보여줘도 구태여 어리광부리고 싶지 않았다. 허리에 둘린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꽃으로 시선을 돌린다.
“테츠로군은 붉은 장미가 어울려요.”
칸나는 명백하게 화제를 돌리고 있었다.
“흐음.”
구태여 짚고 넘어가는 대신 쿠로오는 장미로 시선을 던졌다.
“그런가.”
눈길을 끄는 붉은색을 닮아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게 익숙한 꽃과 같아서 사랑할 수밖에 없다. 주어지는 애정이 향기로웠다. 입안이 달았다. 향기는 코끝을 스치고 습관처럼 뇌리에 맴돌았다. 그래서 종종, 두려워졌다.
“응. 그래서, 너무 예쁨받아서 걱정이야.”
무심결에 입 밖에 내뱉고는 칸나는 아차 싶었다. 잠시간 동안 아무 말도 없는 애인에 슬쩍 시선을 올렸다. 내려다보고 있던 쿠로오의 시선과 마주쳐 피할 사이도 놓쳤다.
“아, 음. 그러니까-“
쿠로오는 몸을 낮추고 시선을 돌리며 단어를 고르는 칸나를 마주 봤다.
“테츠로군이 꽃이라면 오로지 누님을 위해서 피었을 겁니다만.”
큼지막한 손을 들어 흘러내린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가꿔본 적 없는 정원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곳에 홀로 핀 장미가 기꺼워 바라보고 있으니 무서워졌다. 보다 어울리는 곳이 있는 게 아닐까. 누군가 내가 아닌 이에게 꺾여버리는 것은 아닐까. 식물과는 친하지 않았기에 조심스러웠다. 홀로 걱정해도 아무 쓸모도 없었지만 옹졸한 자격지심이라 해도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두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누군가 어여쁘다, 탐을 내도 그게 당연하게 보여 화보다도 두려움이 컸다. 결국, 종종 꽃이 핀 이유를 잃고 울타리 밖을 헤맸다. 울타리 밖에 서서는 꽃 걱정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칸나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알고 있어요.”
그리 말하며 설핏 웃는 얼굴에 쿠로오는 부러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뭐, 꽃보다는 고양이에 가깝겠지만.”
“그런가?”
“꽃이어선 누님을 만질 수 없잖아?”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에 칸나의 눈이 동그래졌다가 가늘어졌다.
“하지만 테츠로군이 꽃이면, 난 마음대로 할 수 있겠죠?”
“어라, 누님. 테츠로군을 마음데로 하고 싶은 겁니까? 무엇을?”
“에에, 글쎄요.” 칸나는 장난스레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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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밤을 헤매도 식물과 친해질 순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네가 피었다. 먼발치에서 바라보는게 훨 편하다던 생각이 무색했다. 눈앞에 핀 꽃이 아름다워 탐이 났다. 나를 위해 존재한다는 듯이 메마른 토지에 꽃을 피워낸 네가 어여뻤다. 향기가 났다. 진하디 진한 꽃향기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막연한 상상은 현실에 비할 수 없어 내 소소한 가정들은 모두 애매한 끝맺음을 맞이했다. 아무래도 좋았다. 네가 나를, 나를 위해 피어주었다. 그걸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