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겁쟁이 페달 - 아라키타 야츠토모x선
*바이올렛 :: 영원한 우정&사랑 ___written by. 독선
1.
초인종 소리가 들리자 아라키타 야스토모는 인터폰을 확인하려다가 말았다.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문을 두드리며 야스토모야! 야스토모! 하고 제 이름을 불러댈 것은 한 명밖에 없었다. 하여간 시끄러운 녀석. 머리를 벅벅 긁어대며 현관문으로 다가가던 아라키타는 문을 열기 전 걸쇠를 문에 걸고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틈이 생길 만큼만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손에 들고 있던 화분을 아라키타의 앞에 들이밀려던 그녀는 애매하게 열린 틈에 당황한 표정으로 꽃을 치우고는 문을 열어달라며 눈만 빼꼼 보이고는 현관문을 두드렸다. 야스토모야. ……야스토모? 나, 나 들어가면 안 될까? 시끄러운 놈은 출입 금지다. ……조용히 하겠습니다. 그녀에게 확답을 받아내고 나서야 걸쇠를 풀고 완벽하게 문을 연 아라키타는 입을 꾹 다물고 현관문부터 조심스레 들어오는 그녀를 보며 픽 웃었다. 자기가 불러놓고서는, 시끄럽다고 내쫓으려고 하고. 나지막하게 투덜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아라키타는 특유의 건들거리는 목소리로 대꾸하려다가 달싹거리는 그녀의 두 입술을 엄지와 검지로 꾹 잡아 누르는 걸로 대신했다. 목구멍에서 나오지 못하는 목소리를 내뱉으려고 웅얼대는 것이 나쁘지 않았으나 그대로 누르고 있으면 입을 열어준 다음이 시끄러워질 게 분명했으니, 아라키타는 투덜대지 말고 들어와라. 라는 말로 그녀에게 다시 한 번 경고 아닌 경고를 하고 손가락을 떼었다.
“그나저나 웬일이야. 집으로 오라는 말을 다 하고.”
“아, 내가 불렀었냐?”
“……나 다시 집에 갈까? 너무한 거 아냐?”
“농담이다, 인마.”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오며 들고 있던 화분을 아라키타에게 건네주었고, 아라키타는 의아한 얼굴로 화분을 받아들면서도 책상의 한 모서리에 화분을 내려놓고서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아라키타의 맞은편에 의자를 끌어와 앉고서는 그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본인이 부른 이상 말문을 이쪽에서 열지 않아도 대화를 시작하겠지. 그, 뭐냐. 이런 거 물어볼 사람이 너 밖에 없어서. 그녀의 예상대로 아라키타는 천천히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고 이야기의 주제는 상상보다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그, 러니까 ……고백을 받았는데. 아라키타는 답지 않게 더듬거리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고 그녀의 표정은 서서히 굳어갔다. 아라키타가 시선을 바닥에 고정하고 얘기를 이어나가는 것이 아니었다면 분명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아라키타가 마침내 이야기를 끝내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양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어디 아프냐? 기어코 그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뱉는 아라키타의 반응에 그녀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등으로 꾹꾹 눌러가며 진정시키고는 고개를 들었다. 입가에 미소를 덕지덕지 바르고는 느릿하게 그 말에 대꾸했다. 우리 야스토모가 고백을 다 받고, 이제 이 누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아. 하? 어디가 아픈가했더니 정신이 안 좋냐? 누나는 얼어 죽을. 여튼……그렇다고. 킨조 녀석한테 말하기에 그 놈은……. 이런 일이 익숙해서 아무렇지 않을 것 같지? 그렇지, 그 망할 이케맨 자식. 아라키타는 들고 있던 핸드폰을 침대의 한 구석에 던지고는 그대로 침대 위로 몸을 젖혔다. 그래서, 그걸 말한 이유가 뭐야? 그녀가 묻자 아라키타는 작게 앓는 소리를 내고는 젖혔던 몸을 다시 일으켰다. 그녀의 물음에 대답할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라키타가 제 물음에 대답하지 못하자 그녀는 물음을 조금 바꿔보았다. 받아줄 거야? ……그건 네가 신경 쓸 게 아니지 않냐? 그럼 대체 왜 부른거냐구. 그냥 이야기만 들어주는 거였으면 전화로도 괜찮았잖아. 아라키타는 추궁하는 그녀의 물음에 입을 꾹 물었다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몰라, 인마.
2.
진심이 담긴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무슨 기분이 든다고 했더라? 아라키타는 제 앞에서 얼굴을 붉히고 있는 여성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분명 토도 녀석에게 무어라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비슷한 느낌은 하나도 들지 않고 그저 당황스러움만 가득했다. 저는 이 사람을 처음 보는데, 이 사람은 제 뭘 보고 좋아한다고 얼굴을 붉히고, 이렇게 고백을 하는 걸까. 아라키타는 답을 미루려다가 후일이 귀찮아질 것 같아서 딱 잘라 거절했다. 처음 보는 사람과 감정이 어쩌고 저쩌고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았다. 여자가 눈물을 흘리며 달려가는 것 같았지만 아라키타는 그저 여자를 보며 신파극 찍고 있네. 하고 짧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순정만화일지 모르겠지만 제게는 그저 일상의 단편일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순정만화라면 저도 찍고 있었던가.
아라키타는 고백을 받는 순간 본능적으로 떠올랐던 얼굴에 잠깐 정신이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주소록을 뒤지려다가말고 다이얼을 열었다. 주소록을 찾는 것보다 번호를 직접 누르는 것이 더 빨랐다. 아라키타는 신호가 몇 번 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입가를 슬쩍 올리고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오늘 뭐하냐?
3.
아라키타의 신경질적인 대답 이후로 그녀는 별 다른 말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화분이 계속 눈에 거슬렸다. 보통 고백에는 꽃을 내밀며 한다지만 그의 성격 상 꽃을 좋아할 리도 없었고, 처분도 귀찮아할 것 같아서 고심하여 고른 화분이었는데. 이렇게 자신까지 불러가며 고백에 대한 걸 상담하고 있는 와중에 또 하나의 짐을 얹어주기는 싫었다. 하루만 더 일찍 얘기할걸. 화분 같은 거 고민하지 말고, 그냥 바로 좋아한다고, 이제 친구로 남아있기는 싫다고 고백이나 할 걸. 억울해지는 기분 속에서 눈물이 퐁퐁 쏟아질 것 같아 그녀는 결국 침묵 속에 잠긴 분위기를 깼다. 즐겁거나 희망찬 말은 아니지만 이대로 조용함에 잠겨있으면 숨이 막혀 익사할 것 같았다.
“뭐, ……네가 알아서 잘 하겠지. 더 할 말 없으면 갈게.”
“어? ……어, 그래. 잘 가라.”
아라키타는 제가 대체 어떤 말을 꺼내려고 그녀를 부른 것인지 스스로도 감이 오지 않았다. 고백을 하려고 했던 걸까. 그것도 아니면 단순히 질투 유발이라도 하려고? 아라키타는 침대에서 일어나 현관을 나가려는 그녀를 붙잡았다. 딱히 답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순간 눈에 들어온 화분의 꽃이 낯익은 탓이었다. 분명 어디선가 본 것 같았는데. 갑작스레 팔을 잡힌 그녀의 의아한 눈빛에 아라키타는 턱짓으로 화분을 가리켰다. 저 화분은 뭐냐, 니 거 아냐? 그녀는 화분을 쳐다보지도 않고 씩 웃고는 방을 가리켰다. 야스토모 방이 너무 휑해서, 화분이라도 놓으라고. 선물이야! 말려죽이면 안 돼! 아라키타의 손에 힘이 빠지고 팔을 잡았던 손이 완전히 놓아지자 그녀는 현관문 밖으로 빠져나가려다가 문득 몸을 멈췄다. 아, 맞아. 야스토모. 그녀의 부름에 아라키타는 뭔데, 하고 대답했고 그녀는 물었다. 저거, 예전에 너랑 나랑 같이 본 적 있었는데. 혹시 꽃말 기억나? 그녀의 말에 아라키타는 낯익음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분명 누군가가 저것을 받아와서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아라키타는 고개를 저었고 그녀는 현관을 완전히 빠져나가며 말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그녀의 목소리가 겹쳤지만 아라키타는 희미한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영원한 우정!”
4.
그녀가 떠나고 난 뒤, 아라키타는 침대로 돌아가 그 위에 걸터앉고는 마른 세수만 반복했다. 생각나고 말았다. 킨조에게 고백하던 누군가가, 절 생각하면서 키워달라며 주고 갔던 화분이었다. 킨조는 버리라는 제 말에 식물은 죄가 없다며 화분의 꽃을 키운다고 했었고, 그녀는 옆에서 꽃의 꽃말을 검색하다가 감탄을 내뱉었다. 이거, 꽃말이 사랑이네! 아라키타는 무언가가 단단히 잘못됐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