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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타프리 - 이치노세 토키야x호시카게 아오이

 *티보치나(princess flower) :: 온정, 한결같은 사랑 ___written by. 에안

오늘 아침엔 메일이 왔다.

 

병원에서 정상적으로 사회활동을 해도 괜찮을 거란 진단을 받은 뒤, 학교에 다시 나가게 되었다. 촬영 스케줄이나, 연습으로 인해 성실한 학생은 아니었지만, 개학 첫날부터 못 간 건 역시 신경 쓰였고, 아오이의 부모님도 고등학교는 졸업하는 쪽을 바라셨다.

사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친해진 친구들은 수가 적었다. 허나 다행인지, 새로 배정된 반에는 아는 아이들도 몇 있었고 대체로 자신에 대해서 그리 나쁜 생각을 가지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적어도 대화하면서는 그렇게 느껴졌다. 느껴지는 건 적의보다는 약한 흥미와 호기심. 아오이 나름대로 했던 걱정이나 불안은 많이 사라졌다.

확실히 관심을 가지지 않는 쪽이 더 편안하다. 그녀는 그 생각에 소리 죽여 웃었다. 아주 예전, 그녀의 친구가 똑같은 말을 했었다. 당시에 그건 너무 슬프지 않겠느냐고 물어봤었던 것 같은데, 토키야는 피식 웃기만 했었다.

지금은 조금 이해될지도.

 

어린 배우는 몇 달 동안 인터넷 기사에서 이리저리 치이고 데굴데굴 입방아 위를 구른 뒤론 지쳤을지도 모르겠다.

정말 지쳤다 하더라도,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지 약 열흘 만에 규칙적인 생활에는 어느 정도 적응하였다. 오히려 겨우내 숨을 죽이고 조용히 지내던 것보다는 훨씬 즐거웠다. 편하게 쉴 시간도 주어졌고, 수업도 들어야 했고. 그러고 보니 첫 교시는 수학 수업이었는데, 교과서를 챙겨왔었던가?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린 건 아오이가 교과서를 사물함에서 꺼내와 자리에 다시 앉았을 때였다.

도착한 메일은 샤이닝 사장님으로부터, 불안하게도 제목은 [HAHAHA] 라고 쓰여있다. 아오이는 잠시 주저하다, 메일을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내용은 그 날 방과 후에 사무소로 찾아와 달라는 이야기. 새로운 작품의 캐스팅에 아오이가 고려되었다는 이야기였다. 회복한 지 몇 주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손이 절로 핸드폰을 꽉 쥔다. 들어간 힘을 살짝 빼고 사장님께 보낼 답을 작성해 보냈다. 그리고 토키야에게 보낼 것도 하나. 아팠던 동안 가장 걱정하고 챙겨줬던 건 토키야였으니까. 다시 활동을 시작할 것 같다는 이야기는 당연히 해야겠지.

오늘 수업은 조금 일찍 끝났으면 좋겠다.

 

 

* * *

 

 

“토키야와 함께, 멜로드라마의 조연을요?”

 

사장은 희극적인 제스처로 앉은 자리에서 빙그르르 돌더니 우뚝 멈췄다. 특유의 커다란 목소리가 하하하!! 하고 웃었다.

 

“YESSS! 두사람은 알고 지낸 지 모오옵시 오래된 친구. 그러니 더욱 함께 있으면 시너지 효과가 up up up 될 것이 분명합니da!”

 

하지만, 하고 운을 떼자 사장이 혀를 요란스레 굴리면서 노노노, 라던지 부정하는 소리를 낸다. 사장님의 옆에 서 있던 휴우가 선배가 사장의 명령은 절대적이라고 반쯤 중얼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저거, 이제 반쯤은 입버릇이 되어가는구나. 아오이는 푸스스, 허탈하게 웃었다.

OH! Mr. 이치노세, 왔군요! 하는 과장된 목소리에 바로 어깨가 경직된다. 아오이, 호시카게 아오이. 진정해. 숨을 깊게 쉬고, 느리게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사오토메씨 …아오이.”

 

자신의 이름에서 미미하게 부드러워지는 목소리 톤은 그녀를 반기고 있었다. 얼굴은 여전히 사무적인 무표정을 띄고 있지만, 곁으로 금세 다가와 살짝 눈인사한다. 긴 속눈썹이 깜빡, 하면서 슬쩍 눈웃음을 짓는다. 손이 절로 긴장해서 꽉 옷자락을 쥔다.

 

“이번 달 말부터 촬영을 시작하는 드라마에 YOU들을 출연시키고 싶다는 offer가 들어왔습니da. 물론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캐스팅 가능성이 몹시 high! 두 사람의 의사를 듣고 싶어 이 자리에 불렀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나yo?”

 

짧은 침묵. 토키야가 슬쩍 곁눈질로 이쪽을 본다. 가능할지 묻는 표정에 아오이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깜빡, 그도 알았다는 듯 눈길을 거둔다.

 

“네, 하고 싶습니다.”

“해보겠습니다.”

“좋습니da. 그러면 우선 대본과 시나리오를 나눠주지yo. Mr. 이치노세는 잠시 남아주시겠습니까?”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네, 하고 답한다. 아오이는 사장이 손짓하는 대본을 하나 챙기고 사장에게 목례했다. 특유의 요란스러운 웃음소리가 닫은 문 너머로 들리는 것만 같다.

 

사장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의자에 앉아 숨을 돌렸다. 복도에는 오가는 사람이 적었다. 다들 일하러 갔을 시간이니 당연한 걸까? 오랜만에 와서인지 조금 생경한 기분이 든다. 이곳도 나의 현실이다. 현실, 소중한 현실이라. 현실이라고 하면 방금 사장님이 제안한 것도 신경 쓰인다.

같은 사무소에서 두 명 이상의 탤런트가 같은 드라마에 비중 있는 역으로 출연하는 건 보통 형평성이 없다고 하여 암묵적으로 기피되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번에 토키야와 함께 출연하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논의에 가장 크게 관여했을 만한 사람은 다름아닌 샤이닝 사오토메.

 

아오이는 대본 위로 손가락을 톡톡 두드렸다. 지금 토키야가 남아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도 아마 아오이 자신에 관한 이야기일 확률이 높다. 지금 사장님은 약하게나마 그녀의 편의를 봐주려고 노력하고 있으니까. 아니, 정확하게는 촬영에 문제가 생기지 않기 위해 주의하는 것일지도.

혹시 다시 말할 수 없게 된다면.

심리적으로 압박받는 상황에서 드물게 발생하는 징후였다. 그녀의 병명은 함묵증이었다. 2개월간, 한 마디도 소리 내어 말할 수 없었다. 누군가의 앞이 아니더라도,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글씨로 써서 보이는 말과 입 밖으로 나오고 싶어 하던 목소리는 체온과 종이의 온도 차만큼 차이가 있었다.

그 온도의 사이에서, 그저 슬펐고 무서웠을 뿐이다. 그런 시기가 있었다.

 

지금은 지나갔다. 그거면 충분했다. 손가락을 규칙적으로 두드리는 걸 멈췄다.

 

토키야가 사장실의 문을 열고 나왔다. 자신을 발견하고 다가오는 발걸음이 빠르다. 무슨 이야기 했어? 옆자리를 손짓하며 아오이가 미소지었다.

“데뷔에 관련된 이야기였습니다. 이번 작품에 관한 이야기도 짧게 들었습니다, 다른 캐스팅에 관한 이야기도 짧게 하셨고, 특별한 건 없었습니다.”

완전한 사실은 아니다. 아오이의 표정을 유심히 눈여겨보는 것도 그랬고, 시선이 마지막으로 그녀를 비껴가 바닥을 향한 것도 그러했다. 아오이는 모르는 척 미소를 지었다. 그는 그녀가 웃을 때 안심했다. 예상대로, 그도 좀 느슨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 작품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 있으신가요? 유명한 소설의 드라마화라고 들었는데, 저는 아직 읽어보지 못한 작품이더군요.”

“응, 읽어본 적 있어. 저번 달에 유키무라 씨가 좀 생산적인 활동을 하라고 쥐여줘서 그만.”

 

슬픈 표정을 지어 보이며 흑흑 소리를 내자 토키야가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었다. 아오이는 그만 씨익 웃고 말았다. 커다란 손이 머리 위를 꾹 눌러 내렸다. 으앗, 큰 소리를 내자 피식 웃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온다.

 

“아호이, 기운이 넘치네요?”

“바보 아닌데요!”

 

아, 그러십니까? 손이 살짝 더 힘을 실어 아래로 누르다가, 살짝 머리를 헝클어뜨린다. 그만두라며 작게 웅얼거리면서 앞머리를 정돈하자 그가 더 큰 소리로 쿡쿡 웃는다. 낮고 기분 좋은 소리. 좀 더 가까이에서 듣고 싶어. 그런 생각을 목 뒤로 넘겼다.

그가 흐트러진 머리를 손으로 가볍게 빗겨준다. 긴 손가락이 시야에 들락날락, 조심스럽게 머리에 닿는다. 다행히도, 손과 머리칼에 가려져서 토키야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 작은 미소를 짓고 있을 거야.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떤 표정을 짓는지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어떤 눈으로 그를 보게 되는지.

그녀는 꽤나 이전에 대답을 알아버렸다.

다 됐습니다. 하고 귀 뒤로 머리칼을 넘겨주는 손길. 볼에 스친 손이 여전히 따뜻했다. 조심스레 눈을 뜨자 맞닿은 시야에서 푸른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아, 세상이 그 푸른 빛으로 가득히 차오른다. 눈을 감아도 피할 수 없는 아름다운 색.

안 된다, 조금 더 경계를 늦춘다면 들킬지도 몰라. 저 색에 홀려서 모든 걸 다 말하게 될지도 몰라. 볼에 닿은 손을 부드럽게 밀어내며 미소를 짓자. 환하게, 상냥하게.

고운 모양의 눈썹이 살짝 찡그렸다가, 다시 매끈하게 펴졌다.

 

“그러고 보니 당신과 같은 작품에 출연하게 된 건 오랜만이군요. 마지막으로 함께 나왔던 게 언제인지.”

“재작년엔가, 같이 예능에 나왔던 거 이후로는 방송 자체에 같이 나가는 건 처음이지 않아?”

“그렇군요. 그때 이후로는…”

 

말을 흐리며 흘깃, 아오이를 쳐다보다가 그가 시선을 거뒀다. 그들이 말한 때 이후로는 많은 일이 있었다. 토키야가 소속사를 옮긴다든지, 아오이가 아팠다든지. 이 이야기는 하지 않은 게 나을지도 모른다. 암묵적으로 흐른 동의에 둘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무튼, 하고 토키야가 입을 떼었다.

 

“아직 대본을 훑어보지 못해서 어떤 역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아오이, 당신은 확인해 보았습니까?”

 

절레절레,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야. 아마 조연..이라고 하면 짚이는 캐릭터는 몇 있지만, 대본으로 옮기면서 얼마나 스토리가 수정됐을지는 모르는 일이잖아. 집에 가서 찬찬히 읽어보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수긍하는 듯한 답을 작게 중얼거리며 토키야는 잠시 생각에 빠진 듯, 조용해졌다. 그리고,

 

“열심히 하는 자세인 건 좋습니다만, 몸은 꼭 조심하세요. …요즘 식사는 제대로 하고 다니는 것 맞죠? 학교에서 누가 힘들게 한다든지, 그런 것도 아니고? 잠도 제대로 자고 있나요? 아직 환절기이니 방심하지 않는 쪽이 좋습니다. 또-“

 

이크. 약간 질린 표정을 짓자 토키야가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 있다고 대답하면 오늘은 정말 여기에서 안 끝내드릴 겁니다.”

“헤헤. 주의하겠습니다.”

“부디 그래 주시겠습니까?”

 

응, 하고 확실히 답하자 곧은 눈이 조금 누그러진 빛을 담는다. 좋아요. 착한 아이네요. 손이 이번에는 다정히 머리 위에 닿아 결을 따라 움직인다. 슬쩍 올려다본 얼굴에는 작은 미소가 걸려 있어 잠깐, 숨이 멎었다. 가깝다.

 

“…너무 어린아이 취급하면 안 돼. 자꾸 그러면 언젠가 크게 억지 부릴 줄 알아? 토키야씨.”

 

키득키득,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잠깐 머리 위에 얹어진 손이 주저하듯 멈췄다 거두어졌다. 이상하다, 방금 어색했던 걸까? 그가 어색하게, 아니 어쩔 수 없다는 듯 표정을 굳히고 고개를 저었다. 다시금 말을 거는 목소리는 상냥하다. 언제나 담고 있는 그 일정한 상냥함, 그 일정한 따뜻함. 절대 사라지는 일 없는 온정.

그렇다면 아오이는 그저 엇비슷한 온도를 담은 말로 대답을 해야 한다. 그게 인사라고 할지라도.

 

“-그러면 나중에 또. 메일 하겠습니다.”

“응, 나중에 봐~ 스케줄 힘내고!”

 

손을 흔들며 뒷모습을 배웅할 때까지 이 감정은 마음속에서 빠져나가지 않는다.

 

우리는 과연 괜찮을까?

그녀는 문득 생각한다. 만약 따스함을 넘어서 버린 감정이란 걸 너에게 보이는 순간,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너는 뭐라고 말할까?

그 대답이 상상 가지 않아 그저 비참한 사랑을 온정으로 포장했다. 겁을 먹었다고 해도 괜찮아, 그에게서 멀어지고 싶지 않아. 지금의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너에게 어떤 존재가 되고 싶다. 친구가 되어도 좋아, 가족이어도 좋아.

 

그래도 우리는 마지막까지 괜찮을까?

 

한결같은 마음은 이 질문 앞에서만 입을 다문다.

어쩔 수 없다며 아오이는 흐리게 웃고 말았다. 사랑에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어. 옮기는 발걸음에 감정이 달라붙는다.

 

*2016. 04. 05. with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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