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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e Zero - 코토미네 키레이x코토미네 루리

 *튜베로즈 :: 위험한 쾌락 ___written by. 로즈엘

  하얀 물결이 넘실거리는 화단은 바람이 지나갈 적마다 달콤한 바다가 된다. 물을 흠뻑 머금은 꽃들이 강한 향을 자랑스레 뽐내는 이곳은 평일이 되면 주말의 소란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정적이 넘치곤 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이 화단이 자리한 장소가 교회이기 때문이다.

마침 꽃들에게 물을 주고 있던 루리는, 지금 막 발끝에 채여 도로록 굴러가고 있는 구체가 낯설다고 생각했다. 아니, 정확히는 구체의 실물이 낯설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수십 년이나 살았던 몸이지만 무릇 아이들이 가지고 놀 법한 물건을 가까이 했던 적이 없던 그녀에게 있어선 당연한 수순의 반응이었다.

 

  “신기하네. 이런 게 여기에 있다니.”

 

  물건의 주인 여부나 여기에 놓이게 된 경위 따위가 궁금한 건 아니었다. 그저 처음 만져보는 물건 자체에 호기심이 샘솟았을 뿐이다. 그녀의 창백한 손은 물뿌리개를 내려놓고, 공을 주워 들고, 그리고 망설임 없이 양팔에 힘을 주어 풍선이라도 다루듯 가볍게 공을 터뜨렸다. 그 광경은 어쩌면 아무런 선악 구분도 없이 벌레의 날개를 무참히 뜯어버리는 어린 아이의 무구함과도 닮아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낼 수 없을 힘으로 공을 터뜨린 반동으로 손이 저릿저릿했지만, 그런 요소는 그녀의 호기심을 거두게 할 만한 방해물이 되진 못했다. 구체였던 것의 가죽을 잘게 찢어보고 냄새도 맡아보던 루리가 어느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즐거이 입을 열었다.

 

  “아가, 왔구나. 너도 같이 해보겠니?”

  “그런 야만적인 놀이라면 사양하지.”

  “야만적이라니? 정말 너무하는구나.”

 

  글쎄.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여기기에는 그녀의 얼굴에서 일말의 변화도 찾아볼 수 없었다. 키레이는 루리의 심중을 떠보는 것보다도 작은 화원을 둘러보는 쪽에 더욱 무게를 두었다.

 

  “……이 꽃들, 아직도 키우고 있었나? 금방 질려하고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방치할 거라 생각하고 왔다만, 아무래도 내 예상이 틀렸던 모양이군.”

  “아무리 내가 변덕을 잘 부린다지만 그 정도는 아니란다.”

 

  이미 손에서 떠난 가죽 조각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적기適期에 불어오는 강한 바람이 순백의 꽃들을 제각각 흔들어놓으면서 짙은 향이 올라오는 바람에, 루리도 키레이도 아주 잠시나마 숨이 막히는 듯한 착각을 느껴야 했다.

 

  “꽃들이 참 어여쁘지 않니? 게다가 향도 달콤해서 더욱 기분이 좋아지지 뭐니.”

  “확실히, 꽃은 예쁘군. 하지만 그 뿐이다.”

  “후후. 키레이 아가다운 대답이구나. 그렇지?”

  “마음대로 생각해라. 그것보다도, 이렇게 많이 키워서 어쩔 셈이지?”

 

  그래. 코토미네 키레이는 그런 사내였다. 무언가에게서 느끼는 미를 공감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 이상의 감상은 품지 못한다. 남들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나 즐거움의 기준이 남들과는 다르게 잡혀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할 수 있었다. 제아무리 꽃을 많이 키우고 만족한다 한들 꽃을 가꾸는 수고에 걸맞는 용도가 없다면 그저 장식에 불과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의 성격상 그런 계산을 했을 리도 없다.

해야 할 일이 더 늘었군.

화단의 처분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는 키레이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혹은 알면서도 모르는 체 하는 건지, 루리는 발끝으로 가죽 조각들을 대충 밀어내고 양팔을 활짝 펼쳤다.

 

  “키워서 너에게 자랑하는 일에는 성공했으니, 이제 이것들이 죽을 때까지 돌봐야지!”

  “……그것뿐인가?”

  “그것뿐이란다. 아니면 말려서 책갈피를 만들까? 이렇게 생생할 때 미리 꺾어서 너를 위한 향수로 만드는 것도 좋겠구나.”

  “루리. 이런 향기의 향수는 나보다 너 같은 여성에게 어울릴 것 같다만.”

  “무슨 그런 소리를! 이런 건 어울리느냐 어울리지 않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잖니.”

 

  그에게는, 정말이지 다른 세상의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즉,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루리와는 태어났을 때부터 함께 지냈던 사이지만 이런 상황에서의 그녀에 대해서만큼은 좀처럼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흙으로 된 바닥에 시들어 떨어진 하얀 꽃잎을 일일이 주워담는 루리와 마치 불가사의한 행동을 보는 듯한 눈빛과 표정을 고수하는 키레이 사이에 가벼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물론, 먼저 그 적막을 깨뜨리는 건 언제나 그러했듯 말수가 많은 루리 쪽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가에게는 이 꽃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구나.”

  “내가 꼭 알아야 하는 이름인가?”

  “그럼, 물론이지! 이게 바로 튜베로즈라고 한다더구나. 그런데 말야, 이름에 로즈가 들어가면서 정작 장미와는 관련이 없다는 점이 우습지 않니?”

 

  창백한 손 위의 흰 꽃잎은 한 폭의 어설픈 수채화를 보고 있는 것처럼 현실과는 동떨어지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그게 우습기 때문에 그렇게나 소중하게 여기는 건가?”

  “응?”

  “봐라, 이미 명을 다한 꽃잎까지 주워들고 있지 않나.”

 

  아, 이거? 듣는 사람까지도 맥이 빠질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한 루리는 소리 없이 웃는 얼굴을 보여주고 있었다. 평소의 그녀다운 웃음에 오늘따라 더욱 짓궂음이 잔뜩 섞여서 그런지, 키레이는 옛날 옛적에나 몇 번 읽고 말았었던 어느 동화에서 묘사된 고양이를 연상하고 있었다.

 

  “일단 소중하긴 하지. 이 꽃은 향이 특히 강하니까 땅에 떨어졌더라도 방에 놔두면 적어도 며칠 동안은 내내 향을 풍길 거고?”
  “……흠. 그런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었나.”

  “그렇지. 그리고 이런 꽃잎들을 방에 놔두면 아가 네가 나를 조금이라도 더 자주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이 꽃, 아무리 봐도 너와 나를 닮았는걸.”

  “꽃말이? 대체 어떤 꽃말이기에?”

  “위험한 쾌락, 이라던걸♪”

  “………….”

  “……장난치는 거 아냐! 이건 정말이란다! 못 믿겠으면 거리의 꽃집 청년에게 물어보던가, 아니면 도감이라도 찾아보려무나!”

 

  그의 무거운 침묵을 일종의 의심으로서 받아들인 루리가 변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고 한발 먼저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니 이제 남겨진 가죽 조각과 어질러진 도구들의 정리는 자리에 남겨진 키레이의 몫이었다. 이 교회에 남아있는 존재 중에서 그나마 수족이 자유로운 금색 서번트가 있긴 하지만, 이런 하찮은 일에 나서서 도움을 줄 리가 전혀 없었다.

위험한 쾌락이라.

  루리가 남긴 말을 곱씹은 키레이는 고개를 약간 숙였다. 그 자신의 뒤틀린 본성으로 보면 그건 확실히 자신과 닮은 꽃말이었다. 그리고 그녀 또한 어찌 보면 위험한 쾌락을 추구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녀를 닮았다는 말 또한 맞을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꽃의 색을 성직자로서의 길을 걷고 있는 모습이라 한다면, 그것 또한 옳은 해석이었다. 아, 이토록 청렴한 색을 띠고 있으면서도 야릇한 꽃말을 품는 모순된 꽃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다니.

 

  “……과연. 닮았다는 말이 나올 만도 하군.”

 

  코토미네 키레이는, 평생을 성직자로서 살아온 깨끗한 자는, 파멸이 기다림을 알면서도 운명을 받아들인 자는, 순진하게 피어있는 꽃을 몇 송이 꺾고 어느 꽃잎도 예외 없이 흉측해질 때까지 손 안에서 뭉개었다. 그 순간 입가가 호선을 그리고 있다는 것은, 그 혼자서는 알아차릴 수 없는 진실이었다.

*2016. 04. 05. with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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