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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큐!! - 스가와라 코우시x나나세 유아

 *영산홍 :: 첫사랑 ___written by. 별솔길

  “헤어지자.”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온 말에 스가와라는 저도 모르게 나나세의 눈치를 봤다. 계속 고개를 숙인 채 공부를 하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나나세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샤프를 내려놓고 제 앞에 앉아 애써 침착한 척 하고 있는 스가와라를 쳐다봤다. 헤어지자고? 나나세는 스가와라에게 재차 물었다. 스가와라는 나나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심장이 세게 조여 왔다.

  “우리, 헤어지자.”

  나나세는 스가와라와 눈을 마주했다. 그의 말에 놀라지 않고 오히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한 눈동자에 스가와라는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사귄지 벌써 2년째. 스가와라는 많이 지쳐있었다. 1학년에게 자리를 빼앗겨 벤치에 서게 된 자신. 자신의 기대만큼 늘지 않는 실력. 도쿄로 가길 원하는 선생님. 그리고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시게 빛나는 그녀. 혼란스런 스가와라는 그것들이 무거운 짐처럼 느껴졌다. 스가와라는 자신을 말갛게 바라보는 그녀에 눈을 감았다. 그녀와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여자친구를 짐처럼 느끼는 남자친구가 자신 말고 또 있을까.

나나세는 눈을 감은 스가와라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누구 남친인지, 잘생겼네. 나나세는 힘없이 웃으며 가방을 챙겼다. 그가 요즘 들어 지쳤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배구, 대학, 그리고 자신에게. 그래서 그를 위로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지쳐 이별을 선고할까봐. 그가 자신을 떠날까봐. 하지만 그가 이별을 이야기 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언제가 되든 그를 떠날 수 있게.

  “그래. 우리 헤어지자, 스가와라군.”

  스가와라가 눈을 뜨니 나나세는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스가와라군. 그녀가 부른 자신의 호칭이 낯설었다. 이제 너의 입에서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부를 일은 없겠지? 나는 이제 네 이름을 입에 담을 수 없겠지? 스가와라는 울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무 표정 없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태풍이 온 듯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난 항상, 네 짐을 나눠가지고 싶었어. 네가 힘들면 어깨를 빌려주고, 아프면 품을 빌려주고, 짜증이나 화를 풀 상대가 없다면 내가 그 상대가 됐어. 울지 않고 웃을 때면 널 안아주고, 들을 수 없는 말을 들으면 그들에게 네가 뭘 아느냐고 따지고, 누군가 너를 다치게 했다면 그들을 찾아가 화를 냈어. 네가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어서 홀로 앓고 있으면 네가 기댈 수 있게 널 항상 같은 자리에게 기다려줬어. 왜냐면 네가 내게 조금 더 의지했으면 했으니까. 혼자 모든 걸 껴안고 혼자 아파하지 않았으면 했으니까.”

  나나세가 내뱉는, 힘 하나 없는, 슬픔에 북받쳐 떨려오는 목소리가 스가와라의 심장에 박혔다. 책상 아래 주먹을 쥔 스가와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난 너한테 짐이 아니라 편안한, 의지할 수 있는, 너를 사랑하고 있는, 너의 연인인 유아가 되고 싶었어. 그런 표정 짓지 마. 난 괜찮아. 그러니까-”

  -울지 마.

  나나세가 손을 뻗어 스가와라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스가와라는 가만히 그 손길을 느꼈다. 따뜻했다. 헤어지자 말한 상대에게 너무나 다정한 손길이었다. 스가와라는 주먹을 쥔 손을 펴 아직 제 볼에 붙어있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나세는 그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스가와라군.”

  “유아…”

  “이번에도, 다음에도 꼭 이겼으면 좋겠어. 아마, 보지는 못하겠지만 응원할게. 그리고- 손, 놔줄래?”

  스가와라는 제 손에서 빠져나가는 그녀의 손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처음 보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녀가 울음을 참는, 표정…

  “안녕.”

  나나세는 그에게 등을 보이며 떠나갔다. 나나세의 눈꼬리에 고였던 물이 흘렀다. 스가와라는 말없이 눈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쫓았다. 자신이 멍청해서, 바보 같아서, 또다시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와 같이 있던 교실에서 멀리 떨어지자 나나세는 참고 있던 슬픔을 터트렸다. 그를 사랑했는데 그에게 짐으로 여겨졌다. 그것만으로도 너무 슬픈데 그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다. 나나세는 목적 없이 걷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영산홍만이 바람에 흔들렸다. 나나세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그저 힘없이 주저앉았다. 영산홍 사이에 둘러싸여, 나나세는 소리 없이 잔잔히 눈물을 흘렸다.

나나세의 눈물과 영산홍이 함께 떨어졌다. 말라비틀어진 꽃잎이 눈물에 적셔졌다. 짙은 붉은빛을 내며 천천히 땅에 떨어졌다. 황혼이 져가고, 꽃들은 졌다. 설레었던 그들의 첫사랑은 그렇게 지었다.

❧ ❧ ❧

 

  졸업식. 스가와라는 단상 위에 올라가는 나나세를 눈에 담았다. 매번 수석을 놓치지 않던 그녀가 졸업생 대표인 것은 당연했다. 스가와라는 그녀의 모습과 목소리를 눈과 귀에 깊이 담았다. 전에 봤을 때보다 야윈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가 처량하게 들렸다.

  “--졸업 축하해.”

  나나세의 울음을 삼킨 마지막 말에 결국 울어버린 애도 있고, 티 나지 않게 소매로 눈을 비비는 애들도 있었다. 그녀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단상에서 내려와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건 우리들을 향한 졸업 인사였다.

  그녀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졸업식 노래와 이제 이곳에서 부를 일 없는 교가를 부르고 졸업식이 끝이 났다. 하지만 졸업생 모두 서로 사진을 찍고 연락처가 없는 이들과 연락처를 교환했다. 아니면 졸업을 축하해주러 온 후배들과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건 스가와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가지 마세요!”

  “유급…! 죄송함다.”

  하하… 스가와라를 비롯한 배구부 3학년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자주 놀러오겠다며 후배들을 달래주었다. 사와무라는 이제 배구부의 주장이 될 엔노시타에게 힘내라며 어깨를 토닥여주고 시미즈는 혼자서 이들을 도와주게 될 야치를 격려해주었다. 아즈마네는 니시노야와 히나타에게 울지 말라고 오히려 위로를 받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웃으며 카게야마의 어깨를 몇 번 토닥였다. 그러자 카게야마는 어정쩡한 표정을 하더니 뭔가 결심한 듯 스가와라에게 소리쳤다.

  “스가상-! 나나상과 얘기! 하십쇼!”

  “하십쇼!”

  “오우!”

  아니, 저기… 시미즈에게 격려 받고 있던 야치와 히나타가 소리쳤다. 카게야마의 외침에 한순간 조용했던 주위가 다시 시끄러워졌다. 스가와라는 곤란한 듯 볼을 긁적였다. 하지만 1학년의 말에 타나카와 니시노야를 중심으로 2학년들이 거들었다. 나나세와 헤어진 후로 나나세와 관련된 이야기는 일체 꺼내지 않던 제 친구들마저 후배들의 편을 들어줬다. 스가와라는 어색하게 웃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까 미치미야랑 사진 찍고 있더라.”

  “난 아까 같이 사진 찍었어.”

  “아직 찍고 있는데?”

  사와무라와 시미즈가 스가와라의 옆에 다가가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다. 아즈마네는 그 둘의 행동을 보더니 나나세가 있는 곳을 쳐다보곤 스가와라에게 말했다. 하지만 스가와라는 요지부동이었다. 나나세에게 가지 않는 것이 아닌 가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누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는지 나나세도 스가와라도 말을 하지 않아 몰랐지만 그들은 스가와라가 그 말을 꺼냈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다.

  “어서 가세요. 저러다 다른 분께 뺏깁니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스가와라는 츠키시마의 말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나나세는 친하게 지내지 않던 남자애들과 사진을 찍고 있었다. 힘든 기색을 숨기고 웃으며 친하지도 않던 이들은 졸업이라는 명목으로 그녀를 힘들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좋아하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가갔다. 나나세는 다가오는 그를 눈치채지 못하고 애써 웃으며 형식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나세. 잠깐 얘기 할 수 있을까?”

  “…스가와라군?”

  스가와라를 본 나나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헤어진 후로 나나세에게 처음 거는 말이었다. 스가와라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듯 옆에 서있던 남자애에게 고개를 돌렸다. 2학년 때 그녀와 같은 반이었던 이치노세였다.

  “이치노세. 미안한데 나나세를 데려가도 될까?”

  “어… 응. 나나세상, 졸업 축하해! 스가와라도!”

  “응. 이치노세도 졸업 축하해.”

  나나세는 이치노세에게 웃으며 대답을 하고 스가와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 날 이후로 처음 만나는 그는 생기 넘쳐 보였다. 자신이 그의 곁을 떠나자 그가 드디어 빛을 보는 것 같아 심장이 아파왔다. 스가와라는 나나세의 손목을 잡았다. 많이 얇아진 것 같네… 스가와라는 그것이 제 잘못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괜찮아?”

  나나세는 제 손목을 잡더니 심각한 표정을 짓는 스가와라를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스가와라는 그 눈동자를 마주하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를 끌고 강당을 벗어났다. 나나세는 그에게 끌려가며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와 헤어진 후로 의도적으로 그를 피해 다녔었다. 그래서 이렇게 마주한 것은 헤어진 후로 정말 처음이었다. 항상 멀리서 그를 훔쳐보고 이렇게 걸어가는 그의 등을 보았으니까.

  스가와라가 나나세를 데려온 곳은 사람이 없는 영산홍 몇 송이가 피어있는 체육관 뒤였다. 스가와라는 나나세와 눈을 마주보고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나나세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둘 사이에서 낯선 침묵이 흘렀다.

  “넌 내… 첫사랑, 이었어.”

  긴 침묵 끝에 스가와라의 머뭇거리며 입이 열렸다. 나나세는 그의 말에 눈가가 붉어져 눈물이 고였다. 그에게 이런 말을 직접적으로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스가와라는 자신보다 한참이나 작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내 첫, 여자친구였어.”

  결국 나나세의 고개가 그가 볼 수 없게 아래로 숙여졌다. 스가와라는 제 가쿠란과 와이셔츠에서 떼었던 두 번째 단추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녀에게 한없이 미안했다. 자신 때문에 상처 받아 아파했고, 그것 때문에 성적까지 떨어져 선생님들에게 듣지 않아도 될 말들을 들었다. 스가와라는 손에 쥔 단추를 꾹 쥐었다가 그녀의 왼손을 유리를 만지듯이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리고 나나세의 손바닥을 펴 그 위에 들고 있던 두 번째 단추들을 올렸다.

  “너에게 애정표현을 하기 위해서 엄청 용기 냈어. 네가 혹시 싫어하지는 않을까 네 눈치를 봤어. 그러면서 내가 지쳐버린 거야. 내가 그걸 몰랐어. 내가 지쳐서, 힘들어서 바보같이, 멍청하게 너를……”

  나나세의 발치에 누구 것일지 모를 비가 떨어졌다. 나나세는 단추가 올려진 왼손을 꽉 쥐었다. 스가와라는 나나세의 어깨를 팔로 끌어안았다. 그녀는 여전히 작았다. 이렇게 작은 제 사랑을 아프게 했다는 사실이 평생 갚아도 모자랄 죄가 되었다. 스가와라의 말에 나나세의 어깨가 들썩였다. 스가와라는 나나세를 세게 안았다.

  “내가 미안해. 짐이 아니야. 너는, 내 유일한 안식처고, 휴식처야. 유아. …사랑해.”

  “코, 우시…”

  “응. 유아.”

  사랑해.

  나도.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널 사랑하고 있어.

  스가와라는 그녀를 안은 채 끊임없이 속삭였다.

  그와 그녀가 만났을 때는 영산홍이 만개한 입학식이었다. 2학년이 되어 그녀에게 제 마음을 고백 할 때도 영산홍으로 붉게 물든 어느 날이었다. 그리고 졸업하는 날인, 그녀에게 다시 고백하는 오늘도. 영산홍으로 물들지는 않았지만 이르게 핀 영산홍들이 반겨주는 날이었다.

  첫사랑. 그리고 영산홍. 그에게 그녀는 첫사랑이었다. 그리고 끝사랑이 될 것이다. 그녀와 자신을 만나게 해준, 이어준, 바라봐준 영산홍과 함께.

  스가와라는 영산홍 한 송이를 꺾어 나나세의 귀에 꽂아주었다.

  “예쁘다.”

  스가와라는 나나세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나나세는 스가와라의 품에 더 파고들었다. 짐은 나였어. 바보 같이 그걸 늦게 깨달아서 미안해. 그리고 날 기다려줘서 고마워. 사랑해, 유아.

*2016. 04. 05. with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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