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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노트 - 멜로x티에라

 *델피니움 ::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게요 ___written by. 카논

* 주의: 멜로가 살아났을 경우의 이야기로서 멋대로 망상한 성장au(데스노트 사건 이후 탐정이 된 멜로와 법의학자가 된 드림주 티에라)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익숙지 않은

 

 

  그녀가 아프다.

  평소보다 일찍 주차장에 그녀의 차가 있길래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집에 들어와보니 그녀는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소파에 드러누운 채 나를 맞이하던 그녀는 한 손에 들고 있는 책을 흔들어 보이면서 나를 반겼다.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 어제 내가 읽다가 그대로 테이블 위에 올려둔 것을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제가 읽고 있었다. 무슨 큰일이라도 있나 싶었는데, 눈 앞에 보이는 참으로 그녀다운 모습에 조금 안심하는 내가 있었다. 티에라는 빙긋 웃더니 내게 말을 걸어왔다.

  “오, 달링. 왔어? 오늘은 빠르네.”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무슨 일이야?”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 티에라는 픽 하고 웃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곁에 다가가 머리맡에 앉았다. 내가 주저앉자 티에라가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나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티에라는 나를 힐끔 보더니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다시 누워서는 입을 열었다.

  “나 아파, 달링. 그러니까 오늘 식사는 알아서 해결하도록 해. 아, 배달음식은 절대 안되니까 그거 제외하고. 물론 인스턴트도 안돼. 그리고…….”

  “내 식사는 됐으니까, 너 어디가 아픈데?”

  그녀의 말꼬리를 잘랐다. 그러자 티에라는 들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옮기더니 말했다.

  “단순한 몸살이야. 뭐, 시체를 옮기다가 쓰러져버린 건 나도 놀랐지만. 나도 하마터면 냉동고에서 다른 달링들의 동료가 될 뻔 했다니까.”

  티에라는 농담조로 말하고 있지만 얼굴을 내려다보니 그럴만하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 핏기 없이 마른 입술, 어두침침하게 가라앉은 그녀의 눈가가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분명 그녀의 법의학자이라는 직업 특성상 고된 일과 야근을 많이 하다 보니 피로가 많이 쌓여 생긴 것이리라.

  “그래서 조퇴했어. 엠마에겐 미안한 일을 해버렸지 뭐야. 가엾은 엠마, 아직 익숙하지도 못할 텐데.”

  “언제까지 네가 그 여자의 뒤를 봐줄 순 없잖아. 그 여자는 그 여자고 너는 너야.”

  “그래, 달링 말이 맞아.”

  의외로 순순히 인정한 티에라는 책에 눈을 박은 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혈색이 좋지 않은 얼굴, 가라앉은 목소리, 이따금씩 내뱉는 한숨. 딱 봐도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를 본 나는 나도 모르게 입으로 이런 말을 내뱉고 있었다.

  “오늘은 푹 쉬어.”

  “세상에나, 달링이 그렇게 상냥하게 말해줄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티에라는 빙긋 웃더니 나를 올려다보았다. 푸른 눈에 내 얼굴이 비쳐졌다. 그 푸른 동공에 비춰진 나는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어딘가 걱정이 어린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 이런 얼굴을 하고 있던 거지? 그 사실을 깨닫자 괜히 머쓱해져 손을 들어 그녀의 눈을 가려버렸다.

  “얼른 자.”

  그녀는 후후, 하고 가볍게 웃음을 흘리더니 내게 답했다.

  “오늘은 달링이 ‘특별하게도’ 상냥하니까 순순히 그 말을 듣기로 할게.”

  덮고 있던 담요를 끌어올린 티에라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나는 손을 치웠다. 담요를 코까지 올린 채, 눈을 감은 얼굴을 힐끗 바라본다. 그녀는 몇 분 지나지 않아 고른 숨을 내쉬면서 금방 잠이 들어버렸다. 아마 무척 지쳐있었기 때문이겠지. 어쩌면 계속 깨어있던 건 내게 아프다는 보고를 하기 위해서인지도 몰랐다. 하여간, 이 여자는 대체 왜 자기 자신을 우선시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아프면 그냥 자두면 될 것을. 나는 물끄러미 곱게 감긴 그녀의 눈꺼풀을 바라보면서 손을 뻗어 코까지 덮인 담요를 내려주었다.

  티에라의 아픈 모습은 솔직히 말해서 하우스 시절 이후 처음이다. 그 때 독감에 걸렸던 티에라를 위해서 나는 친구 매트와 함께 병문안을 갔었지. 거센 기침을 하면서도 내게 열심히 대답을 하던, 열이 올라 양 볼이 발간 어린 소녀의 얼굴을 기억한다. 내가 주었던 레몬 사탕을 아끼고 아껴서 먹던 모습도 기억해냈다. 어릴 때부터 티에라는 어떤 상황에 있던지 언제나 나를 신경 쓰곤 했다. 그건 내가 하우스를 나오고 나서 일련의 사건이 있을 때에도, 그녀와 함께 살 때에도, 지금과 같은 관계가 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잠든 티에라의 곁에 앉아서 그녀가 여전히 손에 쥐고 있는 책을 덮어서 테이블 위에 얹어둔다. 이전에 있던 일이 떠올랐다. 나를 도와주겠다고 저도 마피아에 들어가서는, 큰 화상을 입은 나를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단숨에 달려와서 의사에게 몰래 데려다 주고 밤새 간호해주었던 티에라. 정신 없던 상황에서도 그녀가 이름을 부르던 걸 기억하고 있다. …그 때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처럼 곁에 앉아서 그저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을까? 다친 나를 보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을까?

  …아니, 지금 그런 걸 생각해봤자 쓸데없는 일이다. 이미 지난 과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기로 내 자신과 약속하지 않았던가? 그녀 역시 말했다. 과거에 얽매어 사는 사람이 제일 불쌍하다고. 자조적인 목소리였기에 그것이 그녀 자신을 말하는 것을 나는 금방 알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녀가 날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내가 원해서 그런 상황에 놓인 것이고, 그로부터 겨우 벗어난 것이니까. 그녀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세상에서 제일 존경한다는 내가 그런 불쌍한 존재가 되어선 그녀에게 실례일 테니까.

  그 때, 정적을 깨는 듯이 어딘가에서 무감각한 휴대폰 벨 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에 떨어져있던 티에라의 핸드폰이다. 화면을 보니 티에라의 회사 동료 릭으로부터의 것이었다. 내가 멋대로 받아도 되는 걸까, 하고 잠시 고민했지만 서로 얼굴을 아는 사이니까 괜찮겠다 싶어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티에라 씨! 지금 어디세요?”

  “티에라는 지금 집에 있어.”

  “집이요?! 지금 티에라 씨가 와주셨으면 좋겠는……. 어, 멜로 씨에요?”

  그제야 내 목소리를 알아차렸는지, 릭은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는 그에게 설명했다. 티에라가 아파서 오늘 일찍 퇴근을 했다고. 릭은 그제야 납득을 한 목소리로 답했다.

  “어쩐지 오늘은 엠마 씨 밖에 없다 싶었는데……. 무슨 일이래요?”

  “과로로 인한 몸살 같아. 일하다가 쓰러져서 기절해버렸대.”

  “그렇군요. 지금은 좀 괜찮으세요?”

  “자고 있어.”

  곁눈질로 티에라를 힐끗 보고서 답한 내게 릭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옆에서 잘 봐주세요. 이왕 잘됐네요, 티에라 씨 푹 쉬게 해주시고요. 너무 열심히 해서 우리 쪽에서도 걱정했다고요.”

  “…그래?”

  “네, 티에라 씨가 얼마나 열심히 일을 하시는데요. 매일같이 밤을 새시고 매일같이 혼자서 그 많은 일을 다 처리하고……. 물론 저희 쪽에 법의학자가 부족한 것에도 문제가 있긴 하지만요. 그래도 쉬지를 않으니까. 어쩌면 이번에 몸이 한계를 느껴서 쓰러져버린 걸지도 모르겠네요.”

  티에라로부터 그녀의 일에 대한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이런 사태에까지 와있는 줄은 몰랐다. 힘들어 보여서 말을 걸으면 언제나 괜찮다고, 자기는 전혀 문제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문득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하여간, 이 여자는 내 앞에서는 뭐든지 나쁜 건 숨기려고 하니까 문제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티에라가 힘들어한다면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 나는 받은 것이 많았고, 무엇보다 나는 지금 그녀와 각별한 사이가 되어 있으니까. 아주 오래 전부터 티에라는 내게 평소에 이것저것 많이 해주니까 거기에 대한 보답 중 하나라고도 할 수 있겠다.

  “티에라가 받으면 기뻐할만한 게 있을까?”

  문득 입을 열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왜 내가 이런 얘기까지 이 친하지도 않은 남자에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꽃을 사다 주는 건 어때요?”

  “꽃?”

  “꽃을 선물 받고 기뻐하지 않는 여자는 없다고요! 세상에, 설마 여태까지 꽃 한 번 준 적도 없는 거에요? 멜로 씨는 대체 연애를 어떻게 해서 티에라 씨랑 결혼한 거에요?”

  릭의 말을 듣고 나는 몇 가지 지적을 해야만 했다. 첫째, 안타깝게도 나는 성격상 그런 로맨티스트는 되지 못한다. 둘째, 나와 티에라는 일반적인 ‘연애’는 하지 않았다. 셋째, 애초에 여태까지 티에라에게 꽃을 줄 만한 상황은 없었다. 잘 생각해보면 티에라에게서 내가 받은 것은 많았지만 내가 그녀에게 무언가를 주는 것은 없었던 거 같다. 어릴 때였더라면 이것저것 챙겨줬던 기억이 있지만, 하우스를 나온 뒤 나는 무척 바빴으니까. 바쁜 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의 사건이 마감되고 나서는 조금 여유가 생기긴 했지만, 나와 티에라의 사이는 연애라고 하기에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애초에, 우리 사이에 있던 건 연애와는 거리가 멀었다. 지금이야 이렇게 되어버렸지만.

  내가 답을 하지 않자, 릭은 제멋대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튼 꽃을 사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여태까지 준 적이 없으면 더욱 좋은 방법이지 않을까요?”

  “꽃, 말이지…….”

  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 이후에 릭이 무어라고 중얼거린 것 같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전화는 끊겨있었고, 나는 계속 꽃 생각만 하고 있었다. 나는 누워서 잠이 든 티에라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티에라는 여전히 얌전하게 잠들어있다. 마음 속으로 각오를 다지고는, 오토바이의 키를 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결국 오고 말았네. 속으로 중얼거렸다. 화사하게 꾸며진 꽃집 앞에 선 나는 조금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지나가는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내가 꽃집과 거리가 먼 남자로 보인다는 건 인정하지만 이쯤 되면 정말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그냥 돌아가는 게 나을까 싶어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때마침 나온 직원이 내게 말을 걸었다.

  “뭐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아, 그, 선물을 하려고 하는데.”

  막상 말을 하려고 하면 어째서인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싹싹해 보이는 직원은 밝게 웃으면서 내게 다시 물었다.

  “받는 분 성별은요?”

  “여자.”

  “아하, 그렇군요.”

  직원은 그렇게 말하면서 반지가 끼어진 내 손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장갑을 끼고 올 걸 그랬다. 나는 괜히 머쓱해져 얼른 오른손을 자켓 주머니에 쑤셔 박았다. 직원은 친절한 얼굴을 한 채 물어왔다.

  “그럼 받으시는 분 생일이라던가, 아시나요?”

  “7월 6일.”

  무심결에 대답을 하자, 점원은 내게 환한 미소를 지은 채 가게 안 글라스케이스 너머로부터 푸른 꽃을 꺼내왔다. 자잘한 꽃잎들이 가득한 그 푸른 꽃을 내게 내밀면서 점원은 말했다.

  “이건 어떠세요? 델피니움이라는 꽃인데, 색깔이 예쁘지 않나요?”

  점원의 말에 답을 해주는 대신 나는 팔을 뻗어 꽃송이를 손가락으로 매만져본다. 부슬부슬하게 부드러운 꽃잎이 손끝을 간질인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그 푸른 꽃잎은 어딘가 티에라의 눈동자를 닮았다.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점원은 질리지도 않는지 무뚝뚝한 내 말투에도 불구하고 살갑게 말을 걸었다.

  “게다가 이거, 7월의 탄생화에요. 7월이 생일이신 아내 분께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지 않나요? 받으시면 분명 기뻐하실걸요.”

  티에라가 받는 모습을 상상했다. 이걸 받으면 티에라는 기뻐해줄까? 하지만 그 질문에 나는 곧바로 그렇다, 라고 답을 내릴 수 있었다. 그녀가 내게서 받은 것은 뭐든지 기뻐해주었으니까. 그녀가 아직도 내가 주었던 플라스틱 싸구려 팔찌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걸 난 똑똑히 보았고, 그것은 그녀가 어릴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그런 여자였다, 티에라는.

  “이 꽃에 맞춘다면 이런 꽃을 넣어서 어레인지하는 게 좋아요.”

  직원은 그렇게 말하면서 다른 꽃 몇 송이를 더 가져왔다. 내가 그 꽃다발을 티에라에게 안겨줬을 때의 반응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하며 나는 귓등으로 직원의 말을 들었다.

  사버렸다. 몇 분 뒤, 내 품에 안긴 새파란 꽃다발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꽃말고도 다른 선택지가 많았을 텐데, 그 직원이 아내 분이 좋아한다느니 뭐라느니, 그런 소리를 하는 바람에 엉겁결에 사버리고 말았다. 이걸 들고 온 나를 보고 티에라가 안 하던 짓을 한다고 폭소를 터트리지 않을까 걱정이다. 익숙지 못한 일을 하는 것은 여전히 서툴다. 이걸 전해줄 때 티에라에게 뭐라고 말을 건네야 할까? 몸은 괜찮냐고 물어봐야 할까? 그게 아니면, 이걸 받고 기분 좀 풀라고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어느새 나는 집에 도착해있었다. 아직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정하지 못한 채, 나는 다소 복잡한 기분으로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이윽고 복도를 지나 거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느새 일어난 것인지 아까보다 혈색이 좋아진 티에라가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앉아있다. 그녀는 아까 읽다 만 책을 다시 읽고 있었다. 잡지가 몇 권 놓인 커피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컵도 자리를 잡고 있다. 시큼한 커피 향이 코를 간질이는 것으로 보아, 아마 방금 그녀가 끓인 것이겠지. 티에라는 내 기척을 알아차리고 책에 책갈피를 끼우고선 나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어디 나갔다 왔어, 달링?”

  그렇게 말하다가, 내가 안으로 들어서자 티에라는 제 푸른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놀란 눈으로 내 품에 안긴 꽃다발에 시선을 고정한다. 놀란 목소리로 곧장 물어온다.

  “웬 꽃이야?”

  “…너 주려고.”

  아까 생각했던 말들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이런 일은 익숙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티에라는 여전히 놀란 기색이었다.

  “나한테?”

  재차 묻는 티에라를 향해 나는 말없이 고갤 끄덕였다. 그리고 티에라의 앞으로 가서 무턱대고 꽃다발을 내민다. 티에라는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나와 꽃을 번갈아 보다가 순순히 내가 주는 꽃다발을 받았다. 찬찬히 꽃을 살피는 티에라를 향해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맘에 들어?”

  고르고 고르다가 나온 말이라곤 그것뿐이었다. 티에라는 내 쪽으로 고갤 돌렸다. 얼굴이 아까와는 다르게 눈에 띄게 환해졌다. 아무래도 조금이라도 기운을 차린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보고 어딘가 안심하는 내가 있었다.

  “응, 굉장히 기뻐. 하우스를 나오고 나서의 달링이 나에게 선물을 주는 건 극히 드문 일이었으니까.”

  델피니움이네, 이거. 라고 중얼거린 티에라는 찬찬히 말을 이어나갔다.

  “델피니움의 꽃말을 알아, 달링?”

  “아니.”

  단숨에 고갤 내젓자 티에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내게 가르쳐주듯 말했다.

  “기본적으론 변덕이라던가, 내 마음을 알아주세요, 라는 뜻도 있지만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게요, 라는 뜻도 있어.”

  그 말을 듣자 당황하고 말았다. 설마 이 꽃에 그런 뜻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게요, 라니. 그건 대체 어디의 로맨티스트인가? 직원은 분명 알고 있었겠지. …일부러 그랬던 건 아니겠지? 아까 보았던 훌륭한 영업용 미소와 살가운 태도가 인상적인 직원을 떠올리면서 나는 티에라의 반응을 살핀다. 티에라는 꽃다발을 요리조리 살펴보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이거, 내 멋대로 두 번째 프로포즈라고 생각할게. 달링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하는 말로 내 멋대로 해석할 거야. 달링은 이 꽃의 꽃말을 모른다고 했으니까 그럴 의도는 없었겠지만. 그래도, 날 위해서 준 거잖아?”

  그렇게 말한 티에라는 받아 든 꽃을 보면서 환하게 빙긋 웃었다. 그 꽃의 뜻을 전혀 몰랐다고 반박하려다가 티에라의 얼굴을 보고서 나는 입을 닫았다. 평소에 그녀가 짓는 여유롭고 유쾌한 웃음이 아닌, 어딘가 따뜻함이 보이는 미소다. 나는 저 얼굴을 몇 번이고 본 적이 있다. 고맙다고 내가 그녀에게 말하면 지어 보이던 얼굴, 함께 맞이하던 아침이면 내게 아침을 차려주며 보이던 얼굴, 내가 그녀에게 프로포즈를 했을 때의 보이던 얼굴, 조촐한 결혼식에서 드레스를 입고서 나를 보며 짓던 얼굴. 그 환한 얼굴을 설마 여기에서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나는 그 미소를 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물론 네 멋대로 해석해도 좋아. 널 위해서 준 건 맞는 말이니까. 티에라 너도 알다시피 나는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할 줄 아는 남자가 아니거든.”

  “오, 물론이지. 그래야 내 달링이지. 그게 바로 내 달링의 매력이라고.”

  “…내가 이 꽃의 꽃말을 지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걱정 마, 내 달링인 걸. 내 달링은 언제나 나를 행복하게 해주니까.”

  부서지듯이 웃어 보이면서 티에라가 말을 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정말 고마워, 달링.”

  그리고는 나를 향해 그 눈부시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 미소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나 역시 미소를 지어주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티에라는 아까보다 더 밝게 웃었다. 안심했다. 속으로 생각한다. 티에라가 아파하는 모습은 자주 보지 못했으니까, 어쩌면 나도 모르게 걱정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언제나 내 감정을 깨닫는 게 늦었으니까. 아니나다를까, 그것을 깨달은 것은 내가 그녀의 그 환한 미소를 보고 나서의 일이었다.

  “아무튼 네가 기운을 차려서 다행이야.”

  그렇게 말한 나는 소파로 다가가 티에라의 옆에 앉았다. 티에라는 가볍게 웃더니, 이윽고 평소처럼 내게 말을 걸어온다. 평소처럼 내게 몸을 바싹 붙인 채, 내 쪽을 향해 몸을 반쯤 숙인 채,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그녀 특유의 표정으로, 자주 사용하는 향수의 향기를 내보이면서. 내가 잘 알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모습에 나는 안심하고 만다.

  “그러고 보니 달링은 오늘 왜 일찍 온 거야? 무슨 일 있었어?”

  아주 가끔은 익숙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그녀의 질문에 평소처럼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품에 안은 델피니움의 향기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2016. 04. 05. with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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