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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e 시리즈 - 길가메쉬x하와

 *붉은 아네모네 :: 당신을 사랑해 ___written by. 하와

  햇살이 따스하게 비춰내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부드러웠다. 침대 위에서 눈을 뜬 후에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며 잠에서 깨어났다. 아, 벌서. 시간이 이렇게. 늦은 밤까지 잠에 들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겨우 잠든 낯은 아직까지도 피곤함이 가득했다. 그냥, 갑자기 저도 모르는 사이에 스르르 몰려오는 여러 가지 생각들에 결국 혼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탓에 이 지경이 되어버린 걸지도. 피곤한 얼굴로 침대에서 내려와 물이 반쯤 차 찰랑이는 물병을 잡아 컵에 따라 마시며 시선을 돌렸을 때, 눈에 띈 하얀 종이 조각에 발걸음을 옮겼다. 연필을 잡아, 그것을 눌러 휘갈기듯 쓴 필체는 자주 보지 못했지만, 누구의 글씨인지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고 있는 단 한 사람.

 

  얼굴에 희미하게 웃음이 퍼져나갔다. 잠이 깰 때까지 옆에 있어주기를 뒤늦게 몰려오는 잠에 사로잡히면서 생각했었는데, 텅 빈 방 안에는 혼자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었다. 종이쪽지를 다시 책상 위에 내려두고, 창가로 향했다. 조금이나마 따사로운 빛을 차단했던 커튼을 걷어내니 더 화사하게 방 안을 비추는 빛에 눈이 부셔 눈을 감았다. 갑작스럽게 밝아진 시야에 적응이 된 후에야 눈을 서서히 떠올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사람들은 발을 내디뎌 골목길을 걸어 다니고 있었다. 오늘도 다름없는 평범한 하루였다. 그렇지만 제게는 오늘이 조금 우울한 하루였다. 

 

  손을 들어 닫힌 창문에 올렸다. 햇빛 덕인지 따뜻한 미열을 품은 유리가 손바닥과 마주 닿았다. 햇빛을 나른하게 쬐고 있으니 아직까지 몸 가득 남아있던 피로가 깔끔하게 가신 느낌이었다. 아, 당신이 곁에 있었으면 아침부터 좋은 기분으로 일어날 수 있었을 텐데. 누군가에게 애정을 갈구하는 편은 아니었다. 자신은. 그것은 제 주변인들도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누군가에게 사랑을 바라고, 애정을 바라는 것은 단 한 사람에게 분이었다. 제가 사랑하고 있는, 왕 길가메쉬뿐.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그에게 한 적은 없었다. 그에게 직접 사랑한다는 애정 어린 말을 내뱉기에는 아직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스스로를 상처 주고 죽이는 것에 능숙한 계집인 내가, 밝은 햇빛에 비추어지는 금발과, 붉은 보석을 대표하는 루비를 빼다 박은 붉은 눈동자를 가진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면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를 죽이고, 깎아 내렸다. 그 사람을 원하고 사랑하고 있어도 그는 내게 시선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해서, 생각했기에 그 이후로부터 항상 우울하고 또 울지 않던 날보다 눈물을 떨구는 날들이 많았다. 혼자서 좋아하기만 하는 사랑은 그 어떤 사랑보다 슬프고 외로운 것이라고들 말을 하던데, 틀림없이 들어맞는 것에 괜히 더 화가 나서.

 

  그가 없는 시간대에는 혼자서 그를 그리워했다. 얼마 뒤에 다시 돌아올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없는 시간이 외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내게 조금 더 용기가 있었다면, 그에게, 그의 붉은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하고 흔들림 없이 바라보며, 사랑을 고백할 수 있었을 텐데. 사랑을 고했을 때, 그의 답변은 상관없었다. 혼자서만 앓고 앓아왔던 사랑이니까. 거절을 담은 마을 들어도 지금처럼 아플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만큼, 나는, 그를 보며 혼자 이렇게 아파하고 있었으니까.

 

  드라마 속에 나오는 멋진 남주인공을 혼자서 좋아하는 여주인공을 이해하지 못 했다. 적어도 좋아한다면, 좋아합니다. 자신에 마음을 고백할 수 있는 그 용기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 장면들이 제게 있어 깊게 다가왔던 적이 없었다. 우연히 접한 스스로 혼자 괴로워하는 그 장면을 보고 지루하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랬는데. 지금은 누구보다 더 그 장면을, 그 심정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그때 그랬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싫었다. 이런 기분. 이런 감정., 절대 이해하고 싶지 않다고. 눈을 감으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고여 뺨을 타고 뚝뚝 떨어져 내릴 것 같았다. 그래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는 모를 나만 혼자 있는 시간에서.

 

  텅 빈 방 안, 그 안에서 혼자 그를 생각하며 침대 위에서 이불을 끌어올렸다. 몸을 접어 앉았음에도 불편함을 느끼지 못해. 그 정도로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혼자 이렇게 사랑하고 있는 당신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그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눈물을 더 많이 흘렸다. 그에게 말하고 싶다. 그와 시선을 마주하고 손을 맞잡고서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 있죠, 있잖아요. 왕님. 내가, 왕님을 많이 사랑하고 있어요.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당신에 반응은 아무렴 어때, 상관없어. 그렇게 외치고 생각했다. 응어리가 지고 쌓여서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알고 있어요? 왕님? 당신을 너무 사랑하고 있어서, 이렇게 가슴이 괴로워.

 

  눈을 감았다가 뜨면, 금방이라도 그가 서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 이대로 눈을 감고 뜨면 그가 저를 보고 있을 것 같다고 느꼈다. 그래서 눈을 감았다. 그가 정말로 눈앞에 있기를 간절하게 바라면서 눈을 떴다. 여전히 텅 빈 공간, 당신은 없어. 이 방 안에는 오로지 나 혼자만 있을 뿐이야. 허탈하게 웃었다. 웃음소리는 소리 없이 공중에서 사라져버렸다. 추워, 당신이 없는 이곳이, 너무 추워. 빨리 와서, 안아줬으면 해. 

 

  그와 더 가까이 연결이 되어있을 손등 위에 붉은 자국을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었다. 그를 생각하면서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부르고 싶어. 금방이라도 당신을, 내 곁에 와 내 곁을 지켜달라고 부르고 싶어. 하지만, 정말 바보 같게도 당신이 보고 싶다는 그 이유만으로 거짓말을 해서 당신을 부를, 그런 용기가 내게는 없어.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신께 기도를 드리듯이, 당신에게 들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마주 잡은 손을 이마에 가져다 대곤 눈을 감았다.

 

      사랑해, 사랑해요. 왕님. 전해졌으면 좋겠어. 내가 이렇게, 왕님을 사랑해요.

 

  들리지도 않고, 닿지도 않을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그렇게 눈을 감고 말했다. 응어리진 마음에 쌓인 혹을 풀어내듯이 외치고 털어놓았다. 당신과 연결이 되어있을 붉은 자국은 언제나 내 시선을 끌어서, 웃게 만들어. 그렇지만 얼굴에 그리는 미소는 언제나 슬픈 미소겠지. 당신이 보고 있으면, 이 웃음을 보고 어디 불편한 곳이 있냐고 물어 볼 거야. 제게 유난히 다정하게 대해주던 그를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숙여 붉은 자국 위에 진하게 입을 맞추었다. 왕님에게 직접 고백할 용기가 없어. 당신을 제대로 마주 볼 용기가 없어. 그렇기에 왕님과 더 가까이 연결되어있을, 왕님에게 전해질. 나와 당신이 연결되어있는 령주에 대고 고백할게요. 왕님께 내 진심이 이 령주를 타고 흘러가서 고이 도착했으면 좋을 텐데. 왕님을 사랑하는 이 감정이, 어디 하나 흐트러짐 없이 고이 도착했으면 좋을 텐데. 내 이 진실된 감정이 왕님께, 닿았으면 좋겠다고, 나는 그렇게 바라고 있어요.

 

   내가 사랑하는 왕, 길가메쉬.
   내가 당신을, 당신을 ㅡ 사랑해.

 

당신을 사랑하는 슬픈 붉은 꽃, 붉은 아네모네.
붉은 아네모네는 오늘도 닿지 않을 사랑을 당신께 속삭이고 있어요.

*2016. 04. 05. with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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